사랑니,뽑다/최영미
心像 - logos 2006 차명주
사랑니,뽑다
최영미
그 여름의 끝에 나는 치과 의자에 누워 있었다
커튼이 쳐진 커다란 창으로 한줄기 양심의 가책 같은
따가운 아침 햇살이 수상스레 어른거리고
순서를 기다리는 고장난 입들을 쳐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비명을 지르며, 비명을 삼켜야 하는 입을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견디기 힘든가를
주인 몰래 그 캄캄한 동굴 속에서 하루하루 썩어 들어갔을 시커먼 사랑니를
내 몸에 박힌 너의 기억을 단숨에 뽑아버릴수 있다면
마취주사를 맞지 않아도 좋겠지
어느 바늘이 날 찌를지
어느 핀셋이 부어오른 잇몸을 잘못 건드렸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당신의 아픈 그 말이 날카로운 못이 되어
가슴에 박혀 있었기에
아픔도 최면도 없이 삼십 몇년의 생애를 들어냈다.
깨어나 나는 다시 물을 마시고
일어나 다시 나는 신문을 읽고
그래도 생각나면 사랑의 역사를 쓰고 또 지우리라.
빚 독촉하듯 치통 다시 도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