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쿠르베는 눈에 보이지 않는것은 그리지 않았다.
그에게 천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물의 정확한 표현만이
쿠르베의 작가적 신앙이었다.
샤갈의 그림속엔 날으는 신부가 있고 고향의 소가 두둥실 떠 있다.
작고 일그러진 바이올린에선 아름다운 선율이 느껴져 내 귀를 기울이게한다.
쿠르베와 샤갈, 이 두사람은 너무나 다르다.
그렇다고 서로가 틀렸다는건 더욱 아니다.
나는 쿠르베의 그림에 탄복하고,
샤갈의 그림은 사랑한다.
2
스무살 즈음,내가 사랑했던 임순이는 보살을 꿈꾸는 佛者였다.
부처님 오신 날,그녀의 절에 가서 나도 아기부처님을 목욕시켜 드렸고,
내친구 임순이를 항상 지켜주십사고 부처님께 축원기도 드리며
삼배 절을 올렸다.
그해 겨울
내가 다니던 성당 크리스마스 구유 꾸미기에 나를 도왔던 그녀는
동방박사 세사람과 베틀레헴의 밤하늘을 멋들어지게 그려주었다.
그저 나를 사랑해서 나와 함께 했던거다.
그녀는 나의 선량함이 예수님을 믿어서 그렇다고했고
나는 그녀의 보살행을 존경했다.
우리의 관계는 오성과 한음같았고,한산과 습득같았다.
우린 각자의 종교를 선택한적이 없었다.
단지,나를 선택해주신 그 분께 감사할 일이고
그녀를 선택하신 그녀의 부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3
나의 샤머니즘 시리즈를 보신분들이 내 종교를 궁금해 하신다.
난,카톨릭 신자다..온가족 모두가.
사실 한때 icon화를 그리고 싶었으나 다행히도 내 게으름이
결과적으론 예수님을 욕되지 않게 하였다.
가끔씩 올라오는 예진아씨의 곱디고운 성화는
내 마음조차 곱게 물들이고 때론 찬란한 기쁨조차 안겨준다.
내가 그리고 싶었으나 내 능력이 못미쳤던 이야기를 다른 작가들이
해 내고 있었고 영특하신 예수님께서는 나의 손끝에서
당신의 모습이 수난을 당하시는 민망한 순간을 미리 눈치채시고
성화 그릴 재능을 일찌감치 내게서 거두어 가셨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아멘!!
그랬던 내가 샤머니즘을 그렸다.
어지럽고도 혼몽스런 느낌의 무당 이야기..
왠지,기억을 끄집어 내면 보일것만 같은 막연한 그 무서운 아름다움
나에게 있어 샤머니즘이란 오래전 내 조상들의
치성의 정한수처럼 경건한 기도이자,따스한 숨결 같은것이다.
서양종교가 들어오기 이전 온 겨레의 신앙이었고
눈물같은 사무침이 서린 내 할머니들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힘쎈 종교였다.
나는 그들이 기도했던 온 산하에 깃든 神을 그리고 싶었고
저승길의 꽃상여를 그리고 싶었고,
만선을 꿈꾸는 뱃사람들의 용왕신을 그리고 싶었다.
단지,그 아름다운 기도를 그리고 싶었을 뿐 이었다.
지금 나의 종교는 나의 구원이고 기쁨이지만
그 옛날 내 할머니들의 종교 또한 그네들의 기쁨이고 구원이었다.
그리고 너무도 아름다웠다.
나는 그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