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주

키버르 마을의 처녀, 90.9 x 72.7 cm, oil on canvas, 2021

트리슐리여인, 90.9 x 72.7cm, oil on canvas, 2021

프로방스의 안개,72.7x90.9 cm, oil on canvas, 2021

붉은테이블과 화병,65.1 x 53.0 cm, oil on canvas, 2021

하얀 화병, 65.1 x 53.0 cm, oil on canvas, 2021

너를 기다리는 동안, 72.7x60.6 cm, oil on canvas, 2021

노을지는 들판,x cm, oil on canvas, 2021

오베르마을의 교회,x cm, oil on canvas, 2021
유호명님의 작품 감상문
□ 차명주 작가 전시회 관람기 □
필자 포스팅의 특징은 도표가 붙는 데 있다. 글쓰기 자체가 우선 스스로의 기억 강화에 뜻을 두었으니, 끼적거린 바를 자꾸 도표로 정리하게 된다. 이해 돕기 위해 한글 hwp 파일에서 표 만들고, 그것을 캡처해 jpg 파일로 붙인다. 그런데 이렇게 페북에 올린 jpg 파일 해상도가 현저히 낮아 난감하다. 같은 사진을 밴드와 페이스북 동시에 올리면, 페북의 그림파일 화소수 축소는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이 페북의 박(薄)한 화소수 제공은 차명주 작가 그림에 있어서 아주 쥐약(?)이다. 섬세한 질감의 실물 작품 맛을 엄청나게 갉아먹는다.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각각 딱 한 페이지씩만 읽어보면, 글의 밀도 차가 뚜렷하다. 어떤 그림은 멀찍이서 지긋하게 봐야 맛이지만, 또 어떤 그림은 바짝 붙어 꼼꼼히 들여다봐야 맛이다. 차명주 작가 그림을 말하자면, 20호 그림에 돋보기 들이대 살피듯 40호 정도 모니터로 확대해 봐야 비로소 그 작품성 진면목이 드러난다. 치밀하다.
시간과 돈 들여 전시장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터넷이나 종이 매체는 작품의 본래 색상을 오롯이 전할 수 없다. 지면이나 모니터가 협소하여 작품 줄여 실어내니. 원작의 스케일과 느낌도 담아낼 수 없다. 작품이 서양화일 때는 더욱, 붓 터치가 건네는 질감(質感)을 드러내지 못한다. 車작가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길이 10mm나 될까, 무언가를 곧추세워 촘촘히 찍는 무수히 많은 선묘(線描. 점묘[點描]에 견주어 지어낸 말이다.)이다. 그런데 이 선묘의 질감은 물론이고, 붓질마다의 정성 가득한 선묘가 있다는 사실 자체도 그림파일, 특히 페이스북 그림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필자는 이 점이 특히 아쉬워서, 본래의 작품을 싣고 그 아래 몇몇 부분을 확대하여 올려본다. 물론 이 확대된 부분도(圖) 자체도 현장에서 접하는 질감과 조명 아래 색감을 오롯이 담지는 못하였다. 지난 12월 <강원도 소풍전>에 이어, 추석연휴인 이달 22일까지 전시되는 그녀의 2인전 작품전에 다녀왔다.
story의 썰(說)이나 주장(telling)은 각자의 생각이다. 이런 전제에서 그림 문외한이 끼적인다. 여덟 개 작품을 필자는 ➀한 여인의 여정 세 장과 ②꽃병으로 드러낸 마음, 그리고 ③그녀 삶의 태도 세 작품으로 나눠 보았다. 꽃다발 들고 밀밭에 선 ‘키버르 마을의 처녀’ 눈에는 어떤 동경이 가득하다. 마음도 몸도 푸른 듯 바야흐로 누렇게 여무는 생의 봄날이다. 사뭇 다소곳한 자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첫만남 내지 교감이다. 고양이 눈빛과 여인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하였다. 어둑한 실내로 들어온 노란, 푸른, 붉은 구름은 한마디로 채운(彩雲)인데… 아롱아롱 꿈과 희망의 무지개이다. 함께 생을 직조(織造)할 이 드러내지 않았으나, 중앙의 듬직한 화분과 실한 떡잎 두 장이 건강한 앞날을 암시한다. 여인의 모습에서 꼴깍 침 삼키는 긴장도 보인다. 허벅지께 가지런히 모은 손을 보라. 오그려 쥔 손가락에서, 다섯 발가락 힘주어 꺾은 오소소 넘쳐 난만할 희열 그 절정도 읽힌다.
‘트리슐리 여인’의 나뭇단에서 시시포스 바위를 연상하였다. 그러나 같은 듯 다르다. 시시포스는 비지땀 뚝뚝 바위 굴려 산 정상에 올리지만, 기껏 올린 바위는 매번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노동과 형벌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렇지만 트리슐리 여인의 눈매와 입시울은 밝은 신념과 낙관(樂觀)이다. 生가지라 무거운 땔감이지만, 일어나 갈길 멀어도, 간난 헤쳐 등짐 벗을 날 요원해도… 봄날의 처녀와 설레던 만남 그 후에 선 트리슐리 여인의 하루하루는 행복한 것 같다. 구름 두둥실 ‘붉은 테이블과 꽃병’은 키버르 마을 처녀이거나, 너 기다렸다 달달 드렁칡처럼 엮는 처자이다. 벌어진 꽃송이 화사하다. 이에 견주면 ‘하얀 꽃병’ 분위기는 한층 차분하다. 녹녹치 않은 살림이 붉은 테이블 접어 치웠을 수도 있겠다. 칙칙한 연두와 푸름이 달뜬 흥분 이후의 차분한 현실적 일상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 꽃병에 여린 저 핑크빛 기운은 무엇인가.
이 끼적거림은 많은 스토리 중의 다만 한 텔링(telling)이다. 그림에 작가의 삶 투영되기도 하겠지? 그렇다면 마르지 않아 무거운 生물 나뭇단 진(負. 아니, 이었을까?) 삶 고단하더라도, 작가의 여정은 시방 ‘안개 낀 프로방스’ 지방 어느 ‘노을 지는 들판’ 지나 안식의 ‘오베르마을 교회’로 이어진다. 본래 작가의 화풍은 샤갈 풍(風)으로 ‘파스텔 톤, 물리법칙 벗어난 부유, 그러한 환상과 자유’로 보인다. 생의 적재단위가 어깨를 눌러도, 그녀는 고요한 심연(深淵) 옆에 선 미루나무처럼 푸르다. 그게 그것일 것 같지만, 작가의 프로방스 그 산과 숲과 풀은 더 선명하고 아름답다. 그러한 산과 들과 밀밭과 포도원 지나 마음의 안식 교회로 간다. 프리뷰 때 車작가 설명으로는 화폭에서 푸른색이 많이 사라졌다던데, 그래서인가 전시된 여덟 점 모두가 밝고 맑다. 아니, ‘맑다’는 뭉근하다는 표현과 함께 놓을 수 없는 표현일까? 그렇다면, 작품을 몽환적이라 고쳐 말해야겠다.
차명주의 작품에서 물리법칙 벗어난 환상과 자유를 느낀다. 작품의 파스텔 tone 색상까지 고려하면 샤갈이 연상된다. ‘파스텔톤’이란 색조 표현보다, 빛바래 순해진 오랜 절집의 단청이 더 어울리겠다. 가난한 살림(山林) 때문에 방치된 간난의 결과가 빛바랜 단청이라면, 반면 작가의 색조는 맑게 부셔 정갈해진 사념(思念)의 드러남 같기도 하다. 애초에 그것이 고통과 환희, 슬픔과 기쁨 중 무엇이었든, 작가의 그림에서는 모두 투명하게 걸러져 넉넉히 수용된다. 그런가 하면 車작가 작품에서는 빛이 솟는다. 색실 꿰어 땀땀이 박은 선묘(線描)가 캔버스 가득하다. 이것들은 마치 유리섬유처럼 가늘게 빛나는데, 순백의 한지에 남은 덜 풀린 닥나무 펄프처럼 희고 밝다. 이 독특한 기법은 빛일뿐더러 따스하고 편안해 마음의 위안도 된다. 그리하여 작품의 인물과 풍광과 사물이 빛을 얻는다. 독자께서 페북 사진 아니라 실물 접해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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